한의학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의 건강을 지켜온 고유한 의학체계이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빠른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헬스, 표준화 및 AI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지금, 한의학의 미래를 기술과 연결하는 일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30여 년간 한의학의 과학화, 표준화, 그리고 국제무대 진출을 이끌어 온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최선미 박사이다.
최 박사는 한의표준질병사인분류 개발부터 ISO 전통의약 의료기기 국제표준화, 한의 전자의무기록 체계화, 그리고 경혈 전자약에 이르기까지 전통과 미래를 잇는 다양한 연구를 선도해왔다. 한의학의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녀가 어떤 비전으로 연구를 이어왔으며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함께 깊이 이야기 나누어 보고자 한다.
Q1. 자기소개와 현재 맡고 계신 역할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약데이터부의 책임연구원 최선미입니다.
현재 ‘스마트 경혈자극기술 임상 실증’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한의융합과학스쿨 대표교수로서 인재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또한, ISO 전통의학 분야 의료기기 국제표준화 업무도 맡고 있습니다.
Q2.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저는 1994년 10월 12일, 한국한의학연구원 개원과 함께 입사해 31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한의진단명과 진단요건 표준화 연구를 진행하며 변증진단의 근간을 마련했고, 그 결과가 한방병리학 『변증론(辨證論)』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후 사상체질진단의 객관화 연구를 통해 유전체·면역물질·안면·체간·성격 분석 등 다양한 접근으로 객관적 진단 지표를 발굴하고, 임상데이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연구 초기엔 역량이 부족해 많이 힘들었지만, 그 경험 덕분에 후배 연구자들의 성장을 돕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와 함께 21년째 한의융합과학스쿨 대표교수로 활동하며, 한의 연구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 학생들이 졸업 후 우간다, 베트남, 미국, 프랑스 등에서 한의학 연구와 교육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큰 보람입니다.
▲ 침구경락 연구를 바탕으로 국내외 산업 전문가 네트워크를 보유하신 최선미 박사님
Q3. 박사님께서는 한의표준질병사인분류, 국제표준화, 전통의학의 디지털 전환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각 사업을 간략히 소개부탁드립니다.
먼저, 한의표준질병사인분류(KCDO)는 2004년 대한한의사협회 용역과제로 진행했습니다. 한의사가 실제 진료에서 KCD(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시범 적용해 본 연구였죠. 한의원에 내원한 환자들의 증상과 변증명을 기록하고, 이를 KCD 질병명과 매칭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당시에는 종이로 기록했지만, 이후 2021~2023년 한의 전자의무기록 개발에 참여하면서 이 과정을 디지털 데이터화로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질병명–변증명–변증설문지–전자의무기록으로 이어지는 체계가 한의진료정보의 디지털 전환 기반이 되는 셈입니다.
국제표준화 활동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한국표준협회 용역으로 3년간 침의 국제표준 제정을 위한 포럼을 운영했고, 이후 2009년에는 침뜸 국제 민간단체 표준 거점기관 사업을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국내 KS표준 1호 ‘일회용 침’을 제정했고, 이를 기반으로 ISO 국제표준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ISO TC249 SC1 WG4 의장으로서 전통의약 의료기기 표준 제정을 주도하며, 국제회의 개최와 조율을 맡고 있습니다.
Q4. 한국한의표준질병사인분류 개정 작업이 임상현장의 한의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보시나요?
의료정보의 표준화는 곧 한의진료의 디지털화의 핵심입니다. 이제는 한의사가 직접 작성하는 전자의무기록이 새로운 의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임상 현장에서 표준화된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야 그 데이터가 모이고, 분석되어, 다시 지식으로 축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거중심한의학(Evidence-based Korean Medicine) 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즉, 한의사들이 각자의 이론과 철학으로 진료하더라도, 표준화된 증상 기록과 진단도구, 의료기기 측정값이 함께 입력되면 데이터로서 공통의 언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한의사들이 협업을 통해 집약적인 의료지식 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몽골 국립의과대학과 MOU체결에 일조하신 최선미박사님
Q5. ‘침구경락을 활용한 디지털헬스케어 기술개발’을 추진하고 계시던데, 한의사들이 향후 어떻게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에 대응해 나가야 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디지털 헬스케어의 핵심은 정량적 데이터입니다. 경혈전자약은 자극의 세기와 같은 치료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분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결합되면 환자의 상태에 따라 최적의 자극 처방을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경혈전자약이 한의사의 진료차트와 원격으로 연동된다면, 치료실·진료실·돌봄시설 간의 의료 연결성이 강화되어 방문진료와 재택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이전에는 ‘병원에 가야만 치료받는 일회성 의료’였다면, 앞으로는 ‘일상 속에서 데이터로 관리받는 지속적이고 맞춤형 의료’로 변화할 것입니다.
한의사들이 지향하는 환자 중심의 전인적 치료가 이러한 기술을 통해 더욱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의사들은 AI와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학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6. 그간의 연구 과정에서 임상 한의사들과의 협업 사례나 기억에 남는 경험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침법발굴조사 연구를 진행할 때, 현장 한의사분들의 도움이 매우 컸습니다. 특정 침법을 사용하시는 한의사분들이 직접 한의원의 치료 사례를 논문으로 발표해 주셨고, 전자의무기록 초안을 실용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해 주셨습니다. 실제 사용 후 의견을 주셔서 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협업을 보수교육 등에서 강조해왔고, 직간접적으로 표준 임상진료지침 개발에도 연결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Q7. 30년 이상 한의학 연구에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열심히 연구하면 성과가 나오고, 그 성과가 다시 연구 의욕을 북돋우는 선순환 구조가 큰 힘이 되었죠.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영향력 있는 논문으로 ‘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리거나, 국제표준을 만들어 내는 성과도 큰 보람이었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의 한의사로서 한의학을 대표하고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 외부의 기대와 관심으로 인한 긴장감 속에서 연구를 해야 했지요.
▲한빛사에 기재된 최선미 박사님의 논문
▲30년 이상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열정을 꽃피우신 최선미 박사님
Q8. 4차 산업혁명, 디지털 헬스, 정밀의료 시대에 한의사가 주도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한의사가 주도할 수 있는 핵심은 한의학적 진단과 치료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재현 가능한 데이터로 축적하는 것입니다. 데이터가 있어야 AI와 디지털 헬스 기술을 접목할 수 있으며, 고문헌이나 논문 자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즉, 현장 중심의 AI-ready 데이터를 한의사가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와 임상의 협업, 근거 기반 진료와 진료 기록의 데이터화가 필수입니다. 한의원에서 진료하는 한의사들은 자신의 진료기록이 데이터화될 수 있도록 정확하고 표준화된 기록을 남기고, 필요한 기술적 도움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또한, 노동력과 시간을 보조하는 기술 도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초기에는 AI나 디지털 의료기기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경험상 기술은 한의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료 수준을 높이는 보조 수단입니다.
미래 의료환경에서는 의과·한의과의 구분이 흐려지고, 누가 환자 중심으로 치료를 발전시키고 데이터로 설명하느냐가 선택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의학 기술은 무엇이든 과학기술과 융합해 소비자 중심으로 발전해야 하며, 그 시작은 데이터화와 표준 준수에서 출발합니다.
Q9. 한의사들이 표준화, 임상 연구, 데이터 기반 진료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요?
한의사들이 표준화, 임상 연구, 데이터 기반 진료에 참여하려면 진료 현장에서의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먼저 자신의 진료차트를 점검하며 사용 중인 용어가 표준화된 용어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비교해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한약의 이름, 용량, 조제 방식 등 기록 방법에도 표준이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고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 됩니다.
진료 기록을 단순히 ‘무엇을 했다’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의 침술이나 한약을 사용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남기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렇게 기록이 정량화되고 표준을 따를수록 다른 한의사와의 공유와 재현이 가능해지고, 여러 한의원의 데이터가 결합되어 가치 있는 분석 자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결국 표준화와 데이터 기반 접근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일상 진료에서 기록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는 실천에서 출발합니다.
Q10. 마지막으로 공공의료와 R&D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한의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공공의료와 R&D 등에서 한의사로 활동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자리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의사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오랜 시간 꾸준히 자리에서 역량을 쌓고 유지해야 합니다.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소명의식을 가진 전사로서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연구 영역에서 긴 시간 고군분투하며 역량을 키우는 후배 한의사들을 보면, 초창기에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행운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결국 공공의료와 연구 분야에서 한의사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하려면, 끈기, 연대, 소명의식 세 가지를 마음에 두고 꾸준히 전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